SBS의 연개소문 3화를 보고 몇마디...
당태종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안시성 전투는 막을 내리고, 이제
앞쪽으로 다시 돌아가서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때는 영양왕
이 다스리던 시기. 남북조를 통일하여, 한무제 이래로 가장 강성함을 뽐내던 수나라
의 사신이 고구려에 도착할 무렵입니다.

1. 기본적인 줄거리는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실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그것을 나름대로 각색하여 살을 붙인 것 같습니다. 수나라 문제가 고구려에 오만한
조서를 보낸 것도, 삼국사기에는 평원왕 대로 되어 있는데, 단재 신채호는 영양왕
8년으로 봤죠. 또한 조선상고사에는 중국에서 전해지는 '갓쉰동전'의 줄거리가 인용
되어 있는데,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나이 50이 되어 늦게 아들을 얻어 '갓쉰동'이라
불렀다는 얘기도 잘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어디까지가 진짜 역사냐는
것인데... 뭐, 어디까지나 사극이니 괜찮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게 틀림없는 진짜
역사라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아무래도 나중에 규염객전도 활용될 것으로
보이네요. 갓쉰동전과 규염객전 모두 연개소문과 이세민의 묘한 라이벌 관계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죠.)

2. 스페셜 1-2화는 상당히 길었지만, 3화는 50여분으로 비교적 짧습니다. 거기다가,
사극의 특성상 폼잡고 느릿느릿 하는 대화가 많아서, 수나라 사신을 맞아 설전을 좀
벌이고, 어린 연개소문이 자객을 피해 도망치는 얘기가 좀 나오다 보니 어느새 끝이
나는군요. 눈에 힘주고 핏대를 올려 목이 쉬도록 무게있는 대사를 외쳐대야 하므로
정말 정통 사극 연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 실감이 납니다. 유명한 을지문덕
장군을 비롯하여, 태학박사 이문진(고구려의 역사서 신집을 편찬한 걸로 유명하죠.)
에다, 조선상고사에서 꽤 비중있게 다루어진 대장군 강이식,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
중상 등등 주요 배역에 여러 연기파 배우들을 캐스팅한 게 눈에 들어옵니다. 조금만
있으면, 김유신과 김춘추도 나온다고 하는데... 하여튼 고구려 뿐만 아니라, 삼국과
중국 등 역사책에 이름이 있는 유명한 인물들이 거의 총출연할 모양이로군요. (대하
사극이니 이렇게 크게 판을 벌일 수가 있나 봅니다.)

3. '내가 멸망시킨 진나라에 비해 고구려의 인구와 군사가 얼마나 많으냐?'면서 겁을
주는 수나라 문제의 조서. 중국사에서 가장 골치아픈 시기가 바로 한나라 이후, 위진
남북조 시대죠. 후한이 멸망한 이후, 유명한 삼국 시대가 펼쳐지는데, 촉은 위에 멸망
당하고, 위는 다시 서진에게 나라를 넘겨주었으며, 서진은 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했죠. 그러나 서진은 부정부패와 내분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다가, 결국 북방 민족
의 침략을 받아서 남쪽의 옛 오나라 영토로 도망. 북쪽에는 여러 이민족들이 정신없이
난타전(...)을 벌이는 오호 십육국 시대가 펼쳐지고, 남쪽에서는 도망친 서진의 후예
들이 동진을 세워 북쪽의 침략에 대항하게 되는데... 결국 북쪽은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하고, 남쪽에서는 동진 왕조를 이어받은 '유송' 왕조가 그에 맞서는, 남북조 시대
가 시작됩니다.

4. 중국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그 힘의 공백을 틈타 크게
영토를 넓히고 여러 이민족들을 제압하여 전성기를 이루죠. 하지만 남북조 시대도 결국
은 끝이 나게 되는데, 결국 용맹한 이민족 출신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한 북조가 남조를
제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뭐, 다들 아시다시피, 북위는 나중에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그것이 다시 북제와 북주로 이어졌다가,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켜 다시
북쪽을 통일한 다음, 양견이 북주의 황실을 무너뜨리고 수나라를 세워 '문제'가 됩니다.
남쪽 왕조는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번영을 누리지만, 아무래도 문인귀족 중심
의 문화적인 기풍이 강한지라 군사력은 약할 수밖에 없는 법. 유송은 제나라로 넘어가고,
제나라는 다시 양나라로 넘어가는데, 양무제는 '보살 황제'라고 불릴 만큼 불교를 숭상
하고 문화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한 대표적인 명군으로 손꼽히죠. 하지만 그만큼 군사력
은 약해질 수밖에 없어, 양무제 말년에는 북쪽에서 망명한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이게 치명타.

5. 남조가 그나마 막강한 군사력의 북조를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양자강을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굳게 지키면 되었기 때문인데, 후경의 반란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틈에,
양자강 상류 지역인 익주와 형주가 고스란히 북쪽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오나라가 멸망할
때와 비슷한 상황. 나중에 남송이 몽골에게 멸망당할 때도 역시 비슷하게 양자강 방어선
이 상류에서부터 무너지는 과정을 겪었죠. (역사적으로 남쪽이 북쪽을 이기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것은, 아마도 명나라의 주원장이 남쪽에서 나라를 일으켜 북쪽의 원나라 잔당들을
몰아낸 것과, 남쪽에 근거지를 두었던 장개석이 북벌을 완성시켜 군벌을 축출한 정도뿐일
겁니다.) 후경의 반란을 평정하고 세워진 남조 마지막 왕조는 바로 진나라. (서진과 동진
의 진나라와는 한자가 다릅니다. 수문제가 고구려를 겁줄 때 예로 들었던 진나라는 물론
이 남조의 진나라.) 당연한 소리지만, 이 진나라는 장강 하류 지대에서 버티고 있던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호구수는 불과 50만호. 거기다 후경의 반란으로 양자강 유역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경제력은 쇠퇴하고, 얼마 안되는 백성들조차 사방으로 흩어져 나라는
엉망진창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지배층은 부정부패와 사치로 썩어가고 있었으니,
인구와 영토가 압도적으로 강한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6. 다시 말해 수문제가 조서에서 '고구려의 인구와 군사가 진나라에 비해 많겠냐'면서 겁을
준 것은 어디까지나 허풍이죠. 고구려가 멸망할 때의 호구수가 69만호였는데, 이건 당연히
진나라보다 많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혹자는 당시 통계는 어차피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은 틀림없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고구려쪽 통계도 마찬가지니
피장파장이고, 조세와 병역 등 국력을 끌어낼 수 있는 자원은 어차피 통계에 올라있는 호구
에 한정됩니다. 다시 말해, 통계에 빠진 인구수도 많았겠지만, 그건 어차피 국력에 별다른
도움이 안되니 논외라는 뜻이죠. 즉, 진나라와 고구려의 국력을 비교하면 50만호와 69만호
의 차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봅니다. 거기다 어차피 후경의 난 이후 양자강
이남 지역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으니, 내분을 수습하고 왕위에 올라 한창 중흥을 도모하던
영양왕 대의 고구려와는 국력에서 비교가 안됩니다. 거기다 고구려는 요동 방어선이 여전히
견고한 상태이니, 양자강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인 진나라와는 더더욱 비교가 안되죠.

7. 이런 상황에서 괜히 와서 오만하게 떠들어대던 수나라 사신은 결국 분노한 영양왕에 의해
연금되고, 영양왕의 아우인 건무는 수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형을 설득하는데... 뒷날 연개
소문과 대립하는 영류왕이 바로 건무이기 때문에 그런지, 여기서 건무는 전쟁을 꺼리는 귀족
들과 손을 잡고 영양왕의 강경책에 반대하는 화친파로 그려집니다. 혹자는 나중에 수나라의
수군을 격파하고, 천리장성을 쌓아 당나라를 견제하는 등, 고구려의 안전을 위해 헌신한 건무
가 너무 소심한 인물로 그려지지 않았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데... 일단 좀더 두고 보십시다.
아무래도 연개소문이 주인공이다 보니, 그와 대립한 인물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네요. 그에 반해 을지문덕이나 강이식 같은 무인들은 굉장한 강경파들로
그려집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연태조는 다소 중립적이지만, 그게 오히려 건무와 귀족들의
눈에는 교활한 것으로 인식되는 듯.

8. 불쌍한 연개소문은 태어나자마자 고구려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라는 예언을 듣고, 귀족들은
물론 숙부에게까지 위험한 놈이라고 경계의 대상이 됩니다. 결국 태어나자마자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조의선인들과 함께 수련을 하며 지내는데, 열살이 되던 해에 거기까지 숙부가 보내온
자객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남쪽의 신라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저래서 연개소문이 주인공
인 작품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등장하게 되는군요.) 하지만 중간에서 자객들에게 따라잡히는
바람에, 호위하던 조의선인들은 피살되고, 연개소문도 칼을 맞고 치명상을 입는데... 제 3화는
여기까지입니다. 뭐, 연개소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신라로 가게 되겠죠. (뻔하잖습니까?)
하여튼 그놈의 예언이 뭔지, 어린애가 참 '사나이의 길을 간다'는 이름하에 고생이 많네요.

9. 그건 그렇고, 음향쪽은 여전히 욕을 먹네요. 특히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배경음악이 수나라
사신이 왕궁에 들어서는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쓰였다 하여 말이 많습니다. 하필이면 일본 게임
음악을 쓸 게 뭐냐는 얘기인데... 뭐, 판단은 각자 알아서 내리실 일이겠죠. 그보다는, '태왕'이란
호칭을 너무 남발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더군요. '태왕'은 어디까지나 광개토대왕, 장수왕
같은 막강한 왕에게 붙였던 특별한 호칭인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고구려의 왕을 뜻하는 일반명사
로 나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여전히 드라마 내내 환단고기에 입각한
'중국은 물론 한때는 천하가 모두 우리의 속국이었다'는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더군요. 이거
어떻게 보면 너무 민족주의 색채가 강하여, 도리어 설득력이 있는 부분마저도 의심스럽게 만드는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물론 좀더 두고 봐야 알겠습니다만...
by 고독한별 | 2006/07/16 00:20 | 영화/게임/책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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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핀치 at 2006/07/16 00:41
조선에서도 바로 전의 선왕은 거의 '대왕'이라고 불렀다고 하더군요. 어렸을 때 했더 KBS1 대하사극에서 본 듯...
Commented by oldman at 2006/07/16 00:56
어딘가에 사로잡혀 그것을 극대화시키려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에 자유로웠다면 좀더 좋은 드라마가 되었을텐데 참 아쉽습니다.
Commented by siguld at 2006/07/16 01:13
아주 엄격하게 연개소문을 평가함에 있어서 '구국의 영웅'보다는 '유능한 국내권력투쟁가'로 기억하는 제 입장으로 그다지 마음에 드는 전개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채호 선생님의 역사관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Commented by 다스베이더 at 2006/07/16 01:33
개인적이지만 오호십육국 시대. 뭔놈의 외울 나라가 이리 많은지 한떄 절규를 했었다지요[..]
Commented by kirhina at 2006/07/16 04:18
오버가 도를 지나치는 것 같아서, 자꾸만 마음에 걸립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보고 싶은데, 그놈의 민족주의 역사관은 보기 싫은 ㅡ 계륵 같은 존재에요. 연개소문이라는 드라마. ㅡ_ㅡ;;
Commented by 더 카니지 at 2006/07/17 23:19
그보다는 과연 허락을 받고 배경음악을 썼는지 그것이 궁금....
훗...뭐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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