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의 연개소문... 역시나 태조 왕건 노선을 걷는군요.
SBS의 연개소문... 역시나 예전의 태조 왕건 노선을 걷는 느낌입니다. (쿨럭)

1. 수나라 문제의 아들이요, 양제의 동생인 한왕 '양량'... 수 문제나 당 태종 같은 명군까지
맥을 못추는 판국에, 이런 인물이야 완전 '바보' 중의 '바보'가 되기 십상이죠. 아니나다를까,
지휘관으로서 지극히 무능함을 넘어, 거의 얼빠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태조 왕건에서와 같이
연개소문의 전투신도 대략 다음과 같은 패턴을 취하는데요. (물론 당연한 소리지만, 저 기본
구조에서 약간씩 변형되긴 합니다.)

(1) 이기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가 지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를 유인한다.
(2) 지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의 지휘관은 오만하게 승리를 확신하며 추격한다.
(3) 지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의 참모는 뭔가 흉계가 있을 거라면서 계속 말린다.
(4) 지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의 지휘관은 참모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작정 달린다.
(5) (주로 한밤중에) 지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가 허둥지둥 매복 지점으로 들어선다.
(6) 이기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화살을 닥치는 대로 쏘아댄다.
(7) 지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는 불화살을 맞고 우왕좌왕하면서 무더기로 쓰러진다.
(8) 지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의 장수들은 뭘 어쩌면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한다.
(9) 지기로 되어 있는 쪽 군대의 참모가 그나마 '막아라!' '전하를 뫼셔라!'를 연발한다.
(10) 승리한 쪽에선 종종 '우리 참모는 역시 제갈 공명 같군'하는 식의 감탄을 연발한다.

2. 사실 매복이란 것이, 시도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모두 도박 같은 것이라, 실패하면 큰
낭패요, 성공하면 큰 재미를 보기 쉽죠. 그래서 양쪽 지휘관들 모두 상대편의 매복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자신들이 매복을 쓸 때는 아주 신중을 기하기 마련인데...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작전을 썼다하면 거의 '매복'이 아니면 '양동작전'이더군요. 그리고 매복을 썼다하면, 100%쯤
승리가 보장됩니다. 매복에 대비한다며 보낸 정찰병은 그냥 주위를 대충 둘러보고 돌아가는
게 고작이고, 지휘관은 화살 맞기 좋게 맨 앞에 서서 룰루랄라 유람하듯이 가기 일쑤입니다.
미리 부대를 몇으로 나누어 한 부대가 기습을 당하면 다른 부대가 도와줄 수 있게 한다거나,
매복을 당했을 경우 신속하게 부대를 재편하여 반격을 노린다거나 하는 움직임은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거의 본 기억이 없습니다. 매복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를 보면 잘 나와 있죠. 거기서 카이사르는 험한 숲속에서 수만명의 적병에게 기습을 당했음
에도 불구하고, 기민한 대응으로 매복을 격퇴하고, 오히려 수많은 적병을 참살해 버립니다.
매복이 과연 우리나라 사극에서 그려지는 것만큼 필승이 보장되는 전술인지... 개인적으론,
그 얘기를 읽고 무척 회의가 생기더군요.

3. 덧붙이면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야간 전투가 너무 많습니다. 통신과 조명이 잘 갖추어진
현대전에서도 야간 전투는 지휘관들이 꺼린다고 하는데, 하물며 고대 전투에서는 어떨까요?
종종 야간 전투에서 부대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승기를 놓치는 것은 물론이요,
지휘관이 아군에게 살해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고 하죠. 아마 낮에 전투를 하면, 여러가지로
신경쓸 일이 많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자세히 볼 수 없도록 야간 전투 장면을 많이 집어넣는
것 같기는 한데... 제작 기술도 이제 많이 발전했으니, 슬슬 낮 전투를 좀 늘리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뭐, 그밖에도 여전히 타격감이 전혀 없는 칼부림 장면이나, 픽픽~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꽂히는 화살, 그리고 굳이 말에서 내려서 자루 긴 병기를 갖고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장수들 등...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장면은 한둘이 아닙니다만, 그걸
다 따지고 들자면 한이 없으니 넘어갑시다. (그렇지만 고구려왕이 왜 하필이면 연개소문의
아버지의 지략을 '제갈 공명'에 비유한 건지는 좀 의문입니다. 고구려에도 명장과 명재상
들이 많은데, 왜 하필 당시에는 나오지도 않은 삼국지 연의에서 신처럼 떠받들어진 제갈량
에 비유한 건지...)

4. 고구려군은 험한 계곡에서 매복 공격을 가하고, 수나라 군사들은 당황한 나머지 가지고
있던 화살을 모두 쏴버리는데... 고구려군은 그 화살을 모으려고 미리 짚단과 허수아비들을
계곡 양쪽에 준비해 놓았군요. 그래서 순식간에 10여만발의 화살을 모아서 본진을 수송해
보내는데... 뭐, 이것도 문제점을 따지고 들자면 한이 없지만, 태조 왕건 때부터 계속되어온
삼국지 패러디의 일환이라고 치고 넘어갑시다. 그리하여 고구려군은 네번 싸워서 네번을 다
지고, 적을 유인하여 요하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데... 불을 피워서 얼어붙은 요하를
녹일 준비를 해놓고, 목책을 설치하는 한편, 아까 빼앗아둔 화살로 적을 저지할 채비를 잘
갖춰놓았군요. 뭐,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수나라 군사는 10만 대군이라고 하고 고구려군
은 1만명밖에 안된다니까, 수나라 군사가 여러 부대로 나누어 동시에 여러 군데에서 도강을
해버리면 끝이겠죠. 고구려군이 아무리 철저히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열배나 되는 적군을
상대로 요하 전역을 지킬 수는 없을테니 수나라의 승리는 뻔합니다. 그런데도 '요하를 건널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다'거나 하는 다른 설명은 일체 없이, 그냥 당연하다는 듯 한군데
에서 격전이 벌어지네요. 좁은 지역에 10만 대군을 몽땅 밀어넣고 우르르 강을 건넌다면...
불을 안 피워도 얼음이 깨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불을 잔뜩 피운 걸 뻔히 보면서도 10만
대군을 모조리 밀어넣는 수나라의 지휘관 양량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멍청하게 그려진
느낌입니다. (쿨럭)

5. 오늘도 연개소문은 김유신 일가와 함께 신라의 서라벌로 향하는 장면에서 아주 잠깐동안
등장했을 뿐입니다. 당분간은 어린 연개소문의 이야기 보다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쪽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올 것 같군요. 100부작이라곤 하지만, 뭐, 시청률이 좋으면 150부작까지
갈 수도 있게죠. 그래서인지 진행이 아주 느긋하고 벌여놓은 것도 많습니다. 다만 너무 느긋
한 진행을 하다 보니, 빠른 것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점점 떠나고 있다는 얘기도 들이는데,
뭐, 그건 좀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죠. 물론, 복잡한 갈등과 서정적인 로맨스가 복합된 퓨전
사극에 익숙한 젊은 시청자들이, 우직하다 싶을 만큼 단선적으로 밀어붙이는 정통 민족주의
사극에 얼마나 호감을 가질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만... 사실 저도 광개토대왕비 아래에서
고구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말갈족의 모습은, 약간 너무 교과서적이란 느낌도 없지 않게
들었습니다. 그에 반해, 드라마틱한 반전은 별로 없어 혹자는 민족주의 강의를 듣는 느낌마저
든다고 불평을 하는데... (물론, 그런 안티 세력의 음모 때문에 시청률이 떨어지는 거라면서,
애국심을 가지고 계속 보는 것이 중국을 이기는 길이라고 반박하는 의견도 있긴 합니다만...)

하여튼 저로서는 다음엔 무슨 삼국지 패러디가 나올지 궁금할 뿐입니다. (퍼퍼퍽~)
by 고독한별 | 2006/07/23 23:21 | 영화/게임/책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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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존다리안 at 2006/07/23 23:26
실제로 야전에서는 고구려군은 수나라군을 제대로 이겨 보질 못했다는군요. TT
-의외로 고구려가 많이 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수나라는 패전 때문에 망했는데 고구려는
승자였음에도 국력이 쇠해 갔다는 거죠.-
Commented by 다스베이더 at 2006/07/23 23:27
근데 분명히 고수전쟁에서 처음 고구려가 밀고 들어갔을때는 고구려가 깨진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에요[안습]
Commented by kirhina at 2006/07/23 23:30
으음... 그러고 보면 참 항상 되풀이되는 식의 전투씬... 이젠 정말 물리는군요.
아무래도 작가가 같은 사람이라 그렇겠지만, 뭔가 참신한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 그리고 개인적으로 연씨 집안을 띄워주느라, 을지문덕 장군의 활약이 죽는 것 같아 자꾸 짜증이 나네요.
Commented by 고독한별 at 2006/07/23 23:36
어떤 분의 '옥의 티' 지적 중에서 압권은, 오늘 전투 시작 직전에 수나라 황제의 아들인 '양량'이
"드디어 이름 석자 날릴 기회를 잡았다."면서 기뻐하는 장면에 대한 지적이었죠. '양량은 이름이
두자인데...'라고 말입니다. (쿨럭)
Commented by 이타프 at 2006/07/24 00:29
↑저도 그 장면 봤을 때 똑같이 중얼거렸죠(...)

뭐..... 사실 이것저것 빼면 볼만한 드라마더군요,
(확실히 KBS의 대하드라마들에 비하면 영 아니지만서도...)
Commented by John at 2006/07/24 01:16
솔직히 사극은 역시 KBS가 최고입니다. 그나저나... 솔직히 카이사르의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천재인 겁니다.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6/07/24 23:32
고구려가 승자 임에도 국력이 쇠한 거는 전쟁터가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에서 설명되지 않겠습니까? 남침한 북한을 격퇴하더리도, 전쟁이 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국가신용도 하락 등의 이미지 타격에, 수도권이 30%만 초토화되도 전쟁전보다 우리 국력은 쇠퇴할 겁니다. 그리고 고구려군은 주로 양측 대규모 군대가 맞붙는 야전보다는, 수성전과 기동전에 강했다고 합니다.
다음번 예상 삼국지 패러디는 고구려와 수나라 수군의 해전에서 적벽대전 패러디가 아닐지...태조왕건에서 써먹은 바 있지만, 눈알삼키기도 마찬가지이니...
Commented by 고독한별 at 2006/07/25 06:17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것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당시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동아시아
최강이었다고 하던데... 어째서 주된 전략이 평원에서의 기병전이 아닌, 산성에서의 방어전
인가 하는 점입니다. 역시 숫자에서 밀렸기 때문일까요?
Commented by 을파소 at 2006/07/25 16:05
고구려는 평시는 평지성에 있다가 전시에 산성으로 올라갔는데, 산성에는 기병도 있었습니다. 고구려 산성은 산세를 이용하여 말 서너마리가 지날 정도로 폭도 넓었답니다. 적군이 산성을 그냥 지나간다면, 산성에서 기병들이 나와 뒷통수를 치거나 보급로를 차단합니다. 그러니 산성을 무시하고 지날 수가 없는 겁니다. 고구려의 산성은 지형을 이용한 방어요새인 동시에 기병들의 활동 근거지였던 셈입니다. 한 산성이 공격당하는 동안 다른 성의 기병들이 활동하면, 적도 이래저래 난감해지겠죠. 이런 산성들이 고구려후기 천리장성이라는 방어선을 구성하는 요소였던 셈입니다. 1차 고당전쟁에서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에서 패한 당군은 이런 교훈으로 2차 고당전쟁에서는 서해를 건너 바로 평양을 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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