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왓치맨을 보고 왔습니다만...
영화 왓치맨... 원작을 못 봤기 때문에, 이게 왜 18금인가 의아했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까
알겠더군요. 잔인한 폭력과 선정적인 장면은 둘째치고, 영화 자체가 굉장히 어둡고 우울할
뿐만 아니라, 던지는 주제와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무척 진지하고 심오합니다. 거기다가
상영시간도 거의 3시간에 가까울 만큼 길기 때문에, 어른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힘들게끔
만들어진 영화가 틀림없는 느낌이었죠. (거기다 거의 벗고 나오는 닥터 맨해튼 때문에 좀...
같이 영화보던 여성 관객들이, 닥터 맨해튼 나올 때마다 '킥킥'하고 웃으며 옆에 있는 남자
친구한테 한번씩 매달리더군요. OTL)

영화 상영 시간의 태반은, 은퇴한 히어로들의 영광과 어둠으로 얼룩진 인생을 소개하는데
할애됩니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그 우울하고도 음침한 영상의 연속에 견디지 못해 자거나
화장실에 가기도 하더군요. 그 영상 속에는, 칼로 범죄자의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을 비롯해,
개들이 어린아이의 다리를 뜯어먹는 장면 등, 보기 섬뜩한 피비린내 나는 영상도 다수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한때의 영광을 뒤로 하고 늙어가면서,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인생
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움을 겪는 불쌍한 영웅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소개가 되죠.

이런 면에서는 함께 개봉하는 영화 더 레슬러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습니다. 아니, 따져 보면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채 암울한 인생을 보내다가, 결국 과거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하여,
답답한 현실에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나 드라마는 은근히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는 워낙 탁월한 영상미와 첨단 그래픽, 그리고 암울한 화면 구성을
잘 살려서, 그런 영광과 추락의 세월을 잘 대비시켜 보여주기 때문에, 지루함을 참고 본다면
과거사 부분에서도 나름대로 재미를 찾을 수가 있기는 합니다.

어쨌든, 이런 과거사의 소개를 제외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벌어진 사건은, 사실 따지고 보면
간단합니다. 시대적 배경은 1985년인데, 가상 역사인 듯, 닉슨이 헌법을 바꿔 3선에 성공하고
미국이 수퍼 히어로의 도움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급속히
고갈되어 가는 에너지 자원 문제로 인해, 소련과의 냉전은 훨씬 악화되어, 핵 전쟁이 거의 코
앞에까지 와 있는 상황이죠. 세상은 참으로 암울하기만 한 처지입니다.

미국이 의지하는 것은, 과거 왓치맨 중 한명으로 지금은 새로운 무공해 원자력 연구에 전념
하여 세계 평화를 되찾으려는 '닥터 맨해튼'이라는 인물. 거의 연금술사처럼 무엇이든 마음
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런 막강한 능력 때문에, 소련은 그
를 두려워 하여 함부로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며, 베트남 전을 종식시킨 것도 바로 그의 힘이
라는 설정이더군요. 그는 사랑하는 여인도 돌아보지 않으면서 오로지 새로운 개념의 원자력
연구에만 몰두하고, 과거 동료로 지금은 엄청난 부자가 된 '바이트'라는 인물이 그의 연구를
지원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영웅인지 악당인지 구분되지 않는 거친 삶을 살아온 '코미디언'이라는 왓치맨
한명이 살해됩니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던, 왓치맨 '로어셰크' (말 그대로
심리 검사에서 쓰이는 로어셰크 검사지 같은 문양이, 뒤집어 쓰고 있는 가면 위에 계속 변화
무쌍하게 나타나더군요.) 는 그 배후를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알고 보니, 그 배후는 놀랍게도
억만장자가 된 과거의 동료 '바이트'... 그는 닥터 맨해튼의 원자로를 폭발시켜, 뉴욕과 LA 등
주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백만명을 죽입니다. 코미디언은 바로 그 음모를 눈치챘기
때문에 살해 당했던 것.

닥터 맨해튼은 자신의 연구를 이용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분노하지만,
바이트는 잠자코 커다란 화면에 전 세계의 뉴스를 틀어 보여줍니다. 그 뉴스들에서는, 닥터
맨해튼이 인류를 배신하고 이런 엄청난 재앙을 일으켰다고 생각한 미국의 정책 변화가 소개
됩니다. 놀랍게도 핵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소련 등의 적국과 손을 잡고, 함께 '인류의 공동
적'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군요. 온 세계 사람들이 손을 잡고 평화와 협력을 노래하여,
신문사는 쓸 기사 거리가 없다고 울상을 짓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평소 논리적 사고를 우선시해 온 닥터 맨해튼은, 이런 기적을 보자 바이트에게 '용서하지는
않지만 이해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로어셰크는 수백만명을 죽이고, 그 시체 더미 위에
평화로운 낙원을 이룩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끝내 진실을 밝히겠다고 고집을 피우죠.
결국 닥터 맨해튼은 자기 손으로 로어셰크를 죽여 입막음을 해버리고 멀리 떠나갑니다. 이리
하여 수백만명의 죽음과, 여러 히어로들의 감추어진 희생으로 세상은 평화로운 낙원이 되고,
인류는 함께 손에 손을 잡고 행복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에 대해 평이 엇갈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호쾌한 히어로물을 기대
하고 갔다면, 삶에 찌든 영웅들의 어두운 모습을 묘사하는 우울한 장면이 굉장히 길게 소개되는
데다가, 결말 또한 허무하고 우울한 것에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은 덧없다'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오기 때문에, 가볍게 즐기며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반대로, 그렇게
진지하고도 무거운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품격이 높고 어른스러운 영화
라며 반길 수도 있겠지요. (속된 표현으로, '굉장히 무언가 있어 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의견이 엇갈리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일 겁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진지한 얘기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진지한 주제를 다룬 작품은 진지한
관점에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이 영화에 대해서도 조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 영화의 주제,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게 옳은 일인가?'하는 고전적인 질문입니다. 아마, 수많은 히어로물에서 (형태만
달리하여) 무수히 반복된 질문인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도 굉장히 진지하고 무겁게 다루어지죠.

그건 좋은데, 애시당초 저 개인적으로는 이 질문에 대해 늘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즉, '과연
소수가 희생한다고 하여, 정말 다수가 행복해 질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
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의문은 왓치맨을 보면서 다시 한번 강하게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아니,
이 영화의 결말이야 말로 그런 저의 의문점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상기시켜주는 측면이 있었죠.

'소수의 희생에 의한 다수의 행복'이라는 고전적 '공리주의' 주제는, 이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닥터 맨해튼이 수백만의 사상자를 낸 원자로 폭발의 책임을
지고 인류의 공적으로 몰린 덕분에, 미국과 소련이 굳게 손잡고 세계 평화와 협력을 맹세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위해 수백만명의 사람과 로어셰크를 희생시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느냐
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이 질문 자체는 나름대로 심오하고 진지합니다만, 저는 거기에 이미
'반칙'이 섞여 있다고 봅니다. 과연 실제로 저런 일이 벌어졌을 때, 미국과 소련이 그렇게 순순히
세계 평화를 맹세하게 될까요? 또 두 강대국이 손을 잡는다면 즉시 인류의 낙원이 건설 될까요?
저는 바로 그런 결론에 회의가 드는 것입니다.

질문을 바꿔 봅시다. "만약 어떤 엄청난 천재가 있어서, 그 사람의 말만 따르면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제가 다 해결될 수 있다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그 천재를 독재 군주로 하는 전제 왕정
체제를 만드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물음을 한번 생각해 보죠. 이 질문은, 현실적으로 무언가
교훈을 주기에는 역시 그 자체에서 이미 반칙을 범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천재가 과연 존재할까요? 바로, 그런 천재가 존재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이 문제의
핵심인데, 그걸 전제로 깔아두고 토론을 시작하면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문제점이 바로 이 영화에서도 드러납니다. 영화에서는 인류의 파괴적인 본성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계속 강조를 합니다. 그게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모든 갈등의 중요한 열쇠
이지요. 히어로들이 아무리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 사람의 인류 공통의 적이 생겼다고 하여, (그 사람이 인간
을 초월할 만큼 전지전능한 힘을 지녔다고 해도) 세상의 모든 분쟁이 일순간에 해결되어버리고
이상적인 평화가 찾아온다는 결론을 지은 것은,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런 기적 같은 결말을 보여줄 거라면,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의 태반을 소비하여 강조한 '인류
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사는 허무한 것이다.'라는 중요한 주제 의식은 대체 무엇이 되겠
습니까?

판타지에서는 그게 정말로 실현 가능한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거기에 어떤 현실을 반영한 해답을 제시하고 싶다면, 적어도 앞뒤가 맞는 얘기
를 해야 합니다. 인류의 본성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이런 극약처방 (원자로를 폭발시켜 수백만
을 죽이고, 그 죄를 닥터 맨해튼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해놓고서,
정작 결말에 가서는 모든 문제가 한순간에 해결되는 기적을 보여준 것은, 제가 보기엔 영화 내내
강조했던 중요한 주제 의식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어둡고 씁쓸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상사의 허망함
을 성찰하게 하는 진지한 측면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깊이 들여다 봐야 할 품격 높은 성인 영화
이긴 하나, 거기서 제기된 '소수의 희생과 다수의 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주제가 다소 진부했으며,
그에 대해 내놓은 해답 또한 한계를 드러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단순히 시간 때우기로 흘려보낼 영화는 아니며, 영화의 주제를 진지하게 고찰해
볼 가치가 있을 만큼 무게 있는 영화란 점을 고려하면, 그 품격을 낮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다만, 반대로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서, 마음의 휴식을 취하러 영화관에 들르신 분께서 보신다면,
아마 오히려 더더욱 마음이 무거워져서 한숨 푹푹 쉬고 돌아가실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by 고독한별 | 2009/03/05 21:06 | 영화/게임/서적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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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나이브스 at 2009/03/06 09:41
원작에 비해 가볍게 변한 주제성입니다만 확실히 좋았습니다.

하지만 왜 나왔는지 모를 '할랠루야 파이어!' 는 참...
Commented by Uglycat at 2009/03/06 12:56
오늘 보고 왔는데 지나치리만큼 난해하더군요...
원작자가 성악설을 신봉한 사람이었는지도... --a
Commented by 루시펠 at 2009/03/06 20:40
닥터 맨허튼의 유래는 맨허튼 프로젝트에서 따왔겠군요. 유래만큼 원자력이 전공이고 말이지요.^^(영화 안본 1人)
Commented by Uglycat at 2009/03/07 07:36
저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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